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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고듣고

[독서메모] 순전한 기독교 (C.S. Lewis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지구 위에 사는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을 갖고 있으 며, 그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 고 사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 은 자연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고 있습니다. 이 두 가 지 사실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대해 명확 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토대입니다.

 

우리는 우주가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우연히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게 만든 힘이 배후에 있는지 여부를 알고 싶습니다. 만일 그런 힘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 힘은 관찰 가능한 사실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사실들을 만들어 낸 실재이므로 단순한 사실 관찰을 통해서는 찾아 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 너 머의 존재가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례가 있는데, 그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이 사례를 통해 그런 배후의 존재 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선은 선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악은 선이 부패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 다.

 

무언가 부패했다는 것은 처음에는 좋은 것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빠져 있는 '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스스로 독립적 인 위치에 서려고 한 것, 스스로 자기의 주인인 양 행세하려 한 것입니 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 이 아니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절제는 특별히 음주와 관련된 말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쾌락과 관련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삼간다는 뜻이 아니라 적절 한 정도까지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심리적 재료가 나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입니다. 따라서 회개할 것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합니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결혼의 엔진을 계속 가동시키는 것은 이 두번째 사랑입니다. 사랑의 느낌은 그 시동을 걸어 주었을 뿐입니다.

 

겸손해지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다면, 제가 그 첫걸음을 알려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 첫걸음이란 바로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 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간 보폭이 큰 걸음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이 한 걸음을 내딛기 전에는 아무 진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은 우쭐대 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아주 우쭐대고 있다는 뜻입 니다.

 

기독교적 의미의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정의 상태가 아 니라 의지의 상태로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 지만 남에 대해서는 배워서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바퀴살들이 바퀴 축과 테두리에 제대로 끼워져 있기만 하다면 다른 살과의 간격도 자연히 바르게 조정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바 른 관계를 맺기만 하면 틀림없이 동료 피조물들과도 바른 관계를 맺 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사람은 다른 사 람에게 그리스도를 비추어 주는 거울, 또는 그리스도를 전해 주는 '운 반인'입니다.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역할을 할 때도 있지 요.

 

교회는 오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 작은 그리스도로 만들기 위 해 존재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 건물도, 성직자도, 선교 도, 설교도 심지어 성경 자체도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어린 아들이 첫 걸음을 떼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지 않을 아버지는 없 습니다. 그러나 다 자랐는데도 씩씩하고 남자답게 성큼성큼 걷지 못 하는 모습을 보고 만족할 아버지 또한 없습니다. 이 작가는 말했습니 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는 쉽지만,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너희도 온전하라는 명령은 이상주의적인 과장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것을 하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그는 지금 우리를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기독교로 회심했는데도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 았다면ᅳ전과 똑같이 속물적이거나 악의적이거나 시기심이 많거나 야심이 크다면 대개의 경우 그 '회심'이 그 사람의 머리 속에서만 일 어난 일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심한 사람 은 자기 신앙이 좀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 게 던져 보아야 합니다.

 

사실 지금껏 우리는 마치 딕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해 왔습니다. 기독교는 불쾌감을 주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할 뿐 호감을 주는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는 것처럼, 상냥한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 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전부인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치 명적인 오해입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딕 퍼킨은 베이츠 양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구원'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호감을 주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어떤 의미에서(이 점에 대해서는 잠 시 후에 설명하지요) 문젯거리가 못 됩니다.

 

제가 이런 극단적인 비유를 사용한 것은, 새 사람이 되는 일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변형'(Transformation)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 십시오. 매일의 야망과 이루고 싶은 바람들의 죽음을,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몸의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온몸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십 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남겨 두지 마 십시오. 주지 않은 것은 진정한 여러분의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 러분 안에서 죽지 않은 것은 죽음을 떨치고 일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으면 결국 미움과 외로움과 절망과 분노와 파멸과 쇠 퇴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를 만날 것이며, 그 와 함께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